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발레리 사블린 (문단 편집) == [[크리박급 호위함|스토로제보이 호]] 선상반란과 발레리 사블린의 [[러시아 혁명|혁명]] == [[파일:스따라졔보이 호 사진과 발레리 사블린의 서명.jpg]] (1974년, 스토로제보이 호 사진과 발레리 사블린의 서명.) [[파일:발레리 사블린과 스따라졔보이 호의 수병들.jpg]] (스토로제보이 호 선내에서 수병들과 같이 찍은 사진.) [[파일:스따라졔보이 호의 수병들과 카드 놀이를 하는 사블린.jpg]] (스토로제보이 호 수병들과 휴식 시간에 갑판에서 카드놀이를 하고 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 1975년 11월 7일, [[러시아 혁명]] 기념일[* 혁명 전까지 러시아는 율리우스력을 써서 10월 25일이지만, 그레고리력은 11월 7일이다.]에 사블린은 자신이 근무하던 스토보제보이 호가 정박한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이자 최대 항만 도시인 [[리가]]에서 동조자들을 모아 11월 8일에 선상반란을 일으켰다. 사블린은 레닌그라드로 향해 혁명의 상징이나 다름없던 [[오로라(순양함)|아브로라]]함과 [[포템킨 반란]]을 본받아 기존 공산당과 정부의 부정부패를 규탄하고 새로운 공산당과 정부 수립을 목적으로 인민들의 무장 혁명 참여와 혁명 의식 각성을 촉구하고 호소할 계획이었으며, 이에 따라 장교 투표를 통해 혁명 계획에 찬성한 8명의 장교를 제외한 나머지 반대표를 던진 장교 7명에 대하여, 장교들이 당직 근무 중 음주 행위를 한 것에 책임을 물어봐야 할 점이 있다며 선내 창고로 유인하여 자신에게 충성하는 병사들을 동원해 빠르게 무력화, 제압 및 감금하는 대응 조치를 하였다. 그러나 그들 중 한 명은 운 좋게 사블린 충성파들에게 잡히지 않고, 발트해 바다에 뛰어들어 리가의 모항으로 수영해 도망쳐서 곧바로 이들의 반란 소식을 정부에 신고하였고, 나머지 함내에서 사블린의 반란 계획에 반대하던 소수의 병사들이 그의 계획을 방해[* 그의 혁명 계획에 반대하던 무전병이 사블린의 혁명에 대한 참여와 지지 호소를 하던 것을 중간에서 민간 전파에서 군용 전파로 바꾸어, 소련 지도부가 때아닌 새벽에 깨자마자 당과 해군사령부가 발칵 뒤집힌 점 등]하면서 그의 혁명 계획은 점차 실패로 기울어가기 시작했다. [[파일:스따라졔보이 호를 추격하는 발트 함대와 해군 항공대.jpg]] (스토로제보이 호에서 발생한 선상 반란을 진압하려 반란 함선을 추격 중인 소련 해군 발트 함대와 해군 항공대, 당시의 급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이다.) 이윽고 선상 반란과 국가 반역에 대한 신고 제보를 들은 [[소련 해군]]과 [[KGB]]는 사블린 충성파들이 몰고 있는 스따라졔보이 함을 추격하였고, 처음엔 같이 진압 작전에 참여한 소련 해군 항공대가 이를 망설이듯이 거부했으나, 결국 사태가 사태인만큼, 상부의 명령에 따라 소련 해군 항공대와 함선의 공격에 함선은 무력화 되었고 KGB 특작부대와 소련 해군 육전대 특수부대들이 사블린파 장병들, 그리고 반란분자의 지도자인 발레리 사블린을 무력화시키기 위하여 불에 타며 발트 해 한 가운데에 멈춰버린 스토로제보이 호에 강습, 승함한 직후 이윽고 빠르게 선상 반란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함선 창고에 사블린과 그의 일당들이 유인하여 무력화 내지 감금하였던 장교들이 진압 작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면서, 사블린은 진압하고자 달려드는 함장의 권총에 다리에 총탄을 맞아 부상을 입었다. 이후 진압군 특수부대에 의해 스토로제보이 호의 선내 창고로 끌려가 부상당한 상태로 거꾸로 밧줄에 매달린 채로 무력화된 사블린은 동조자들과 함께 말 없이 다른 함선이 스토로제보이 호를 견인, 본대로 긴급 복귀를 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하는 신세가 되면서, 그의 혁명은 실패하였다. 6시간 만에 실패로 끝나버린 사블린의 반란은 사블린 본인에게는 자신의 신념과 양심에 따라 움직인 실천론적인 혁명적 움직임이였으나, 소련의 지도부이자 지배층인 [[노멘클라투라]]에게 더할 나위 없는 명백한 반란 행위이자 정적 제거와 반대파들을 향해 본보기로 삼기 좋은 기회였기 때문에 그가 공산주의 이념에서 기인한 혁명을 실천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KGB]]를 시켜 존재하지도 않는 자신들과 연결된 서방의 첩보기관이나 반체제단체에 대한 정보를 모진 육체 고문과 정신 심문으로 캐내려했으나, 사블린은 모진 고통에도 불구하고 이를 끝까지 부정하고 입을 열기를 거부하면서 버티고 있었다. 이후 열린 기밀 군사재판에서 발레리 사블린은 본래라면 반란 혐의와 내란 선동 혐의 등등으로 혁명에 대한 완전한 실행까지 옮기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교화형 15년형을 선고받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법정의 논의가 있었으나, [[전연방공산당|사회주의 전위대]]의 엘리트 중 하나인 [[정치장교]]가 [[소련]]을 향해 '[[수정주의]]'를 단죄하고, 소련을 변혁하고자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려했다는 소식이 서방에 퍼지지 않도록 이 사건과 관련하여 정보에 대한 [[검열]]을 실시하였음에도 수많은 [[소련군]]의 [[전파|신호]]가 [[스웨덴]]의 군용 조기 경보 및 레이더 감시망과 서방의 대소련 감시망에 잡하면서 서방의 추문이 이어지자, 사블린의 행동 계기와 목적이 단지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의 숨겨진 전 발레 무용수 애인처럼 소련에서의 삶에 염증을 느끼고 망명하려 하였다고 평가하였다. 이 술책은 당국에게는 아주 편리했다. 사블린의 이름이 더럽혀지고 그를 잡범으로 처리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또는 금전적인 문제로 서방으로 탈출을 기도한 자로 몰면 되었다. 이러한 술수들은 이 사건의 의의를 축소시켰기 때문에 편리했다. 그의 행위는 반란이나 봉기가 아니라 단순히 범죄에 불과했다고 말하면 되었다.[* 러시아의 역사학자, 미콜라이 체르카쉰.] 그리고 [[노멘클라투라|소련 지도부]]의 위신과 명예에 직•간접적인 위해를 가했다는 점 때문에 당시 소련 서기장이였던 [[레오니드 브레즈네프]]가 악을 박박쓰며 내린 처형 요구에 군사법정은 혐의로는 노동교화형 이상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법률적 근거와 판단을 알렸음에도 불구하고, 소련 지도부는 그의 국가 반역죄에 대한 행동에 책임을 반드시 지게하겠다며, 온갖 직권을 남용한 끝에 법정에서 그에게 [[총살형]]을 선고하였다. [[파일:처형 직전에 찍은 발레리 사블린의 사진.jpg]] (1976년, 그의 처형 직전에 찍은 사진.) 그 후 1976년 8월 3일에 발레리 사블린의 사형이 집행되었고, 그의 시체는 으레 [[높으신 분들]]에게 [[혁명]]이란 승부수를 걸려고 했던 실패한 혁명가들의 말로가 그러하듯이 KGB에 의해 비밀 매장지에 묻혔고, 그의 행보가 완전히 풀린 소련 해체 이후에서야 스토로제보이 호 선상반란을 사블린이 주도하였다는 소련 공산당과 정부에 의해 기밀처리된 역사가 공개되었다. 그가 소련 정부에 의해 처형된 이후에 소련 당국에서는 사블린의 함선이 NATO 영향권 내에 있던 스웨덴 쪽으로 배를 몰았던 것을 근거로 들어 서방과 소련 인민에게 도망치듯이 망명하려던 반역자라고 발표하였다. 사회적 파급 효과를 우려해서 선상 반란에 참여했던 다른 가담자들은 비교적 낮은 형기의 노동교화형이나 사회봉사형을 선고받았다.[* 공범인 알렉산드르 셰인(Александр Шеин)의 경우에는 그의 친구이자 동료, 결정적으로 선상 반란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이유로 노동교화형 10년을 선고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